33. 대통령을 향한 경쟁자들/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1)

01. 대통령을 향한 라이벌들/존 F. 케네디와 리처드 M. 닉슨 (1)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

미국은 이 두 대통령을 정반대의 인물로 기억하고 있다.잭·케네디는 말솜씨가 유창하고 매력적이고 어마어마한 부자이고 영화 배우처럼 잘생긴 반면, 딕, 닉슨은 연설할 때에 더듬거리면서 미소보다는 얼굴을 찌푸리는 법이 많은 캘리포니아 출신의 가난한 소년이었다. 두 사람은 친구로서, 또 함께 초선 하원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더러운 선거의 하나로 대통령 자리를 획득하기 위해서 경쟁을 벌이게 되는, 치열한 경쟁으로 바뀐다.한 사람은 결국 순교자가 되고 다른 한명은 불명예에 끝난다. 케네디와 닉슨은 우리가 생각보다 유사점이 많을지도 모른다. 논쟁이 많았다 1960년 선거 기간 중 미국의 텔레비전 비평가였던 에릭·세바레이도은 케네디와 닉슨 함께”유능하고 깨끗하고 틀에 박힌 사람들인 날카로운 기회주의적이고 강한 신념이나 깊은 열정이 결여되어 있고, 자신의 출세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평했다. 케네디의 부통령 러닝 메이트였던 링동·존슨의 보좌관이었던 에이브·포ー타ー즈은 좀 더 솔직하게”그들은 모두 열심히 일을 하고 지적이지만 핵심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썼다.닉슨은 1913년 캘리포니아 주 요바링다에서 프란시스·닉슨과 한나의 5명의 아들 중 2번째로 태어났다. 가족은 닉슨이 10대 초반 때 근처의 호, 티아로 이사했다. 프랜시스는 밥을 걱정하지 않는 삶이었다. 그는 레몬 농장을 잠시 경영한 뒤 각 야채 가게를 경영하고 닉슨은 빠듯한 예산에 맞춰서 생활하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퀘이커 교도로 리처드 닉슨도 음주, 무도, 욕설, 흡연 등을 멀리하고 퀘이커 교도로 성장했다.닉슨은 숫기로 지나쳤지만, 똑똑한 아이였다.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M. 닉슨)

호이, 티아 고교를 반에서 2위로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 장학생으로 뽑혔다. 불행히도 그는 하숙비를 조달 방법이 없어 하버드 학생이 될 수 없다.대신 그는 근처의 호, 티아 대학에 입학하고 토론, 연극 학교 활동(과 대표였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요즘 그에 관한 하나의 일화가 있다. 호이, 티아에는 프랭클린 주의로 불리는 고급 사교 클럽이 있었지만 닉슨의 가입을 거부했다. 닉슨은 이를 가볍게 넘길 않았다. 그는 자신의 레벨에 맞는 사교 클럽을 개발하고”오소고니앙즈”이라 이름 짓고 평민적인 근본을 자랑하면서 플랑크 린스의 사람들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 핫도그를 먹었다. 이 사건은 닉슨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거부당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멸시했다는 생각은 그의 마음에서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몇년 후 그는 호이, 티아의 사교 클럽에 언급하며” 알지? 그들은 가진 자이며 우리에게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기자에게 말했다. 1936년 닉슨은 듀크 대학의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고 학과 5위로 졸업했다.졸업 후 캘리포니아에서 호이, 티아에 있는 가족과 가까이 법률 사무소에서 일했다. 그에게 감탄했다 한 동급생은 밤샘 공부하는 그에 “철의 머리”란 별명을 붙였다. 법률 사무소 일은 만족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지만 1940년 델마·포드 라이언과 결혼하면서 가족을 기르기 위해서 일해야 했다. 제이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닉슨은 자원 입대하고 해군에서 보급 장교가 된 남 태평양에서 근무했다. 그는 전투는 경험한 적이 없지만 카드를 쓰고 1만달러를 모아 1945년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 돈을 아주 유용하게 썼다. 닉슨 만큼 카드가 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리처드 M. 닉슨 대통령과 아폴로 13호 승무원)

닉슨을 그만큼 괴롭혔다” 가진 자”의 하나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케네디이다. 1917년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는 전설적인 인물인 조지프·P. 케네디와 저명한 보스턴의 정치인의 딸 로스·F의 아들이었다. 조지프·케네디는 단순히 큰돈을 벌었다는 것만으로, 보스턴을 지배하던 상류 사회의 속물 근성을 극복한 강인하에서 공격적이고 도시적인 아일랜드인이었다. 은행과 월가에서 일하던 그는 공언한 대로 35살에 백만장자가 되고 금주령 기간은 양주 밀수로 더 부자가 됐다. 케네디가 10대가 됐을 때 아버지는 영화 산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버는 한편 글로리아·스왕송을 비롯한 당시 유명한 여배우들과 관계를 가졌다. 그의 비즈니스와 사생활에는 오점이 있었지만 어쨌든그는 9명의 아이 각각 21세까지 사용할 수 있는 신탁 기금을 적어도 100만달러씩 마련했다. 호리호리한 갈색 머리에 밝은 환한 미소를 진 젊은 잭은 코네티컷 주의 상류층 학교 춈토 스쿨에 입학하고 1935년 졸업했다. 그는 졸업 앨범에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라는 칭찬을 담고 있을 정도로 평판이 좋았지만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다. 대장염으로 메이요ー 클리닉에서 1개월간 치료를 받고 간염을 앓고 있어 황달에 걸린 듯 보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그리고 그는 많은 친구를 만들었지만 어딘가 어색한 바가 있었다. 친한 친구라도 어깨에 손을 올리면, 덜컥 싫은 표정이 나타나곤 했다. 한 친구는 “잭은 사람이 접촉하지 않고 사람이 자신에게 말하는 것도 싫었다”고 술회 한.

(케네디와 재클린, 그의 딸 캐롤라인)

1935년 춈토 스쿨을 졸업한 케네디는 그의 형의 조카가 한 것처럼 저명한 런던 경제 학부에서 공부하기 위해서 영국으로 건너가서 1년 동안 살았다. 조는 케네디가의 촉망 받는 소년에서 아버지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훈련했다. 영국에서 돌아온 케네디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에 런던을 다시 찾았지만 아버지는 주영 미국 대사였다.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간 케네디는 1940년 나치·독일의 위험성에 대한 졸업 논문을 쓰고 그 논문은 “왜 영국은 잠자고 있었는가?”라는 제목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된 이유 중 하나는 아버지가 3만부 판매 부수를 들어준 때문이다.1941년, 빈약한 등뼈와 잡다한 병에도 불구하고 케네디는 해군에 입대하고 초계기 PT109의 선장으로 남 태평양에서 실전에 참전했다. 어느 날 PT109는 일본 구축함과 충돌 침몰했다. 그는 그날 밤, 부상한 병사들을 구출하고 안전하게 작은 섬으로 옮긴 뒤 이 공적으로 해군과 해병대의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군사 전문가들은 ” 훌륭한 선장이라면 작고 기동성이 뛰어난 함정이 구축함에 충돌하게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닉슨도 케네디도 전쟁을 치르면서 변화한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은 승리하고 곧 번성기에 들어갔지만 지금 당장은 인플레이션이 만연하면서 소비재는 부족하고 주택은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어 소련과 스탈린의 상승세로 미국인은 노동 조합, 학교, 심지어 정부에까지 침투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떨고 있었다. 이것은 편집증의 시대였으나, 수완이 좋은 정치가라면 그런 두려움을 이용하고 선거에서 승리하는 시대였다. 남 태평양에서 돌아온 닉슨은 다른 많은 제대 군인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사이 그는 유복한 은행가 허먼·페리 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PT109를 타고 있는 케네디

PT109를 타고 있는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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