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뺑덕, 할 말 없는 이야기

마담 뺑덕은 심청전이 모티브다. 심청전의 줄거리는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주인공이 심청이고 조연이 심학규이며 악역이 팽덕 엄마다. 마담 뺑덕은 국민의 고전을 새로운 형태로 각색한다. 우선 제목부터 <마담 뺑덕>이다. 제목이 심청전이라면 당연히 주인공은 심청이다. 제목이 마담 뺑덕이니 주인공은 덕이다. 마담 뺑덕은 덕이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심학규와 덕이의 사랑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우선 마담 뺑덕의 전반부는 심청전 비긴스 정도가 된다. 고전소설에는 없는 심학규와 덕이의 과거사를 풀어낸다. 알고 보니 심학규가 나쁜 놈이었다. 글은 조금 쓰지만 천하제일량인 심학규는 대학에서도 여대생과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지방으로 쫓겨난다. 여기서도 내 버릇을 못 들어서 순진한 동네 처녀 덕이를 꼬신다. 갑자기 심학규가 복직한다. 물론 심학규는 곧 덕을 버린다. 덕이는 심학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낙태시키다. 서울로 올라와 연락하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사라진다. 사고가 나다. 심학규의 아내는 자살하고 덕이의 어머니는 타 죽고 만다. 불구멍 속에 어머니를 구하러 들어가는 덕이를 봐도 심학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날부터 심학규는 눈이 멀었고, 덕은 심학규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전반부 심청전 비긴스가 끝나면 후반부부터는 모두가 아는 얘기다. 악녀 뺑덕 엄마로 거듭난 덕이는 심학규를 서서히 몰락시킨다. 청이는 공양미에 해당하는 현금 자루로 교환해 인당수를 건너 일본으로 팔려간다. 결론도 다 알아. 팔려나간 청이는 용왕님을 만난다. 물론 현대적인 용왕님이다. 청이가 돌아오자 당연히 심봉사는 눈을 뜬다. 마담 뺑덕은 심청전이 모티브다. 심청전의 줄거리는 초등학생도 알고 있다. 주인공이 심청이고 조연이 심학규이며 악역이 팽덕 엄마다. 마담 뺑덕은 국민의 고전을 새로운 형태로 각색한다. 우선 제목부터 <마담 뺑덕>이다. 제목이 심청전이라면 당연히 주인공은 심청이다. 제목이 마담 뺑덕이니 주인공은 덕이다. 마담 뺑덕은 덕이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심학규와 덕이의 사랑 이야기로 이끌어간다. 우선 마담 뺑덕의 전반부는 심청전 비긴스 정도가 된다. 고전소설에는 없는 심학규와 덕이의 과거사를 풀어낸다. 알고 보니 심학규가 나쁜 놈이었다. 글은 조금 쓰지만 천하제일량인 심학규는 대학에서도 여대생과 스캔들이 나는 바람에 지방으로 쫓겨난다. 여기서도 내 버릇을 못 들어서 순진한 동네 처녀 덕이를 꼬신다. 갑자기 심학규가 복직한다. 물론 심학규는 곧 덕을 버린다. 덕이는 심학규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낙태시키다. 서울로 올라와 연락하겠다는 약속만 남기고 사라진다. 사고가 나다. 심학규의 아내는 자살하고 덕이의 어머니는 타 죽고 만다. 불구멍 속에 어머니를 구하러 들어가는 덕이를 봐도 심학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날부터 심학규는 눈이 멀었고, 덕은 심학규를 향한 복수심을 불태운다. 전반부 심청전 비긴스가 끝나면 후반부부터는 모두가 아는 얘기다. 악녀 뺑덕 엄마로 거듭난 덕이는 심학규를 서서히 몰락시킨다. 청이는 공양미에 해당하는 현금 자루로 교환해 인당수를 건너 일본으로 팔려간다. 결론도 다 알아. 팔려나간 청이는 용왕님을 만난다. 물론 현대적인 용왕님이다. 청이가 돌아오자 당연히 심봉사는 눈을 뜬다.

이쯤 되면 마담 뺑덕은 전반은 신선하고 후반은 지루한 범작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마담 뺑덕처럼 고전을 재해석한 영화는 영화 역사상 수없이 많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그림 형제는 동화작가로 유명한 그림 형제를 액션 히어로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마담 뺑덕’을 연출한 임필성 감독 자신도 2007년 찍은 두 번째 장면 ‘헨젤과 그레텔’에서 어린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마담 뺑덕도 장르적으로는 재해석 영화의 연장일 뿐이다. 특이하면 한국의 고전을 재해석했다는 것 정도다. 마담 뺑덕은 고전의 재해석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전을 통해 독특한 영화 형식의 실험으로 나아간다. 국민고전을 모티브로 하면 다른 영화와 달리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인물과 이야기다. 심청전을 모티브로 했지만 춘향이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심학규와 심청이와 뺑덕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를 제외하면 남는 건 얘기다. 그동안의 고전 재해석 영화는 이야기 속에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곤 했다. 백설공주가 액션물이 되거나 장화홍련이 공포물이 됐다. 임필성 감독은 얘기도 거의 다 꺼냈다. 전반부에서는 덕이와 심학규의 사랑 이야기로 바꿨지만 이후에는 새로운 전개를 만들지 않는다. 후반부는 ‘신입전’의 이야기 구조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사실 이 후반부는 마담 뺑덕의 논란거리다. 심청전 비긴스처럼 색다르게 보였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가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는 의도치 않게 마담 뺑덕을 독특한 형식 실험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전을 재해석할 때 캐릭터와 이야기까지 포기해버리면 남는 것은 인물관계 속 감정뿐이다. 덕이 심학규를 증오하는 감정, 심학규가 자신을 학대하는 감정, 심학규가 덕이를 연민하는 감정, 덕이 심학규를 애증하는 감정, 정이 덕이를 연민하는 감정, 정이 심학규를 이해하는 감정밖에 남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마담 뺑덕은 전반은 신선하고 후반은 지루한 범작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게다가 마담 뺑덕처럼 고전을 재해석한 영화는 영화 역사상 수없이 많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그림 형제는 동화작가로 유명한 그림 형제를 액션 히어로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마담 뺑덕’을 연출한 임필성 감독 자신도 2007년 찍은 두 번째 장면 ‘헨젤과 그레텔’에서 어린이 동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있었다. 마담 뺑덕도 장르적으로는 재해석 영화의 연장일 뿐이다. 특이하면 한국의 고전을 재해석했다는 것 정도다. 마담 뺑덕은 고전의 재해석에만 그치지 않았다. 고전을 통해 독특한 영화 형식의 실험으로 나아간다. 국민고전을 모티브로 하면 다른 영화와 달리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인물과 이야기다. 심청전을 모티브로 했지만 춘향이가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심학규와 심청이와 뺑덕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캐릭터를 제외하면 남는 건 얘기다. 그동안의 고전 재해석 영화는 이야기 속에서 상상력의 날개를 펼치곤 했다. 백설공주가 액션물이 되거나 장화홍련이 공포물이 됐다. 임필성 감독은 얘기도 거의 다 꺼냈다. 전반부에서는 덕이와 심학규의 사랑 이야기로 바꿨지만 이후에는 새로운 전개를 만들지 않는다. 후반부는 ‘신입전’의 이야기 구조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사실 이 후반부는 마담 뺑덕의 논란거리다. 심청전 비긴스처럼 색다르게 보였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가 구태의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후반부는 의도치 않게 마담 뺑덕을 독특한 형식 실험으로 만들어 버린다. 고전을 재해석할 때 캐릭터와 이야기까지 포기해버리면 남는 것은 인물관계 속 감정뿐이다. 덕이 심학규를 증오하는 감정, 심학규가 자신을 학대하는 감정, 심학규가 덕이를 연민하는 감정, 덕이 심학규를 애증하는 감정, 정이 덕이를 연민하는 감정, 정이 심학규를 이해하는 감정밖에 남지 않는다는 얘기다.

흔히 영화는 종합 예술이라고 불린다. 19세기까지 발달한 수많은 예술 장르의 후예이자 종합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 영화는 많은 예술 장르의 적장자이지만 특히 소설의 직계 후손이다. 19세기 후반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부터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장단편을 넘나들며 소설 이야기를 완성했다. 영화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영화는 무엇보다 서사 장르다. 대중예술로 성장하기 위해 영화는 자신의 서사성을 더욱 강화해야 했다. 어차피 관객은 캐릭터와 스토리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상업예술에서 블록버스터 흥행산업으로 떠오른 영화가 자신의 소설적 특징을 극대화한 것은 당연했다. 특히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기승전결을 갖췄다. 초반에 대단한 볼거리가 나오면서 캐릭터 소개가 단번에 끝나야 한다는 상업영화의 철칙이 확립됐다. 정작 이는 영화 창작자들에게는 질식할 듯한 족쇄나 다름없었다. 영화라는 형식은 수십 년간 같은 형태로 바뀔 줄 몰랐다. 한국영화만이 이런 원칙을 깨지 못했다. 오히려 서사 원칙을 제대로 지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힘에 부친다. 연주도 제대로 못하는데 변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국 영화의 스토리성은 할리우드 못지않은 수준까지 형성됐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형식을 확립했다면 이제 형식을 깨야 한다. 그것은 형식을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소수의 괴짜 영화감독이 이런 형식 실험에 도전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형식이 다르다는 것은 낯설다는 뜻이었다. 생소하면 흥행하기 어렵다. 임필성 감독도 그런 도전 의욕에 불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데뷔작 남극일기부터 남달랐다. 대하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였는데, 사실 좀비물과 공포물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남극일기>는 엄동설한에 죽을 만큼 힘들게 찍었지만 관객들이 낯선 영화가 돼버렸다. 헤르젤과 그레텔도 마찬가지였다. 임필성 감독은 처음부터 고전을 빌려온 뒤 형식 실험에만 몰두했다. 임필성 감독은 영화가 소설 외에도 미술과 음악과 사진에 후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또 망했다. 헨젤과 그레텔은 말은 없고 비주얼만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담 뺑덕’에서 임필성 감독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임필성 감독 스스로는 “발이 땅에 닿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설명한 대목이다. 심지어 후반부에서는 재해석조차 하지 않고 모티브의 스토리 골격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자 영화 속에 감정을 표현하는 넓은 공간이 생겼다. 영화의 서사성이 강화되면 대사와 연기와 연출은 이야기에 종속되기 십상이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사는 상황 설명이 되고, 연기는 상황 묘사가 되고, 연출은 지금의 장면보다 이어지는 다음 장면에 더 매몰된다.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마담 뺑덕>의 대사와 연기와 연출을 캐릭터와 이야기에서 거의 완벽하게 자유롭다. 대시와 인물과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감정선에 철저하게 충실하다. 덕분에 <마당뺑덕>에서는 정우성의 연기도 더없이 안정적이다. 정우성은 그동안 긴 호흡 연기에 약했다. 잘생긴 외모 탓이 컸다. 외모가 빚어내는 드라마를 표현하려다 보니 내면 연기의 감정이 뚝뚝 끊어지기도 했다. 결국 정우성은 실제보다 연기가 서툰 배우처럼 보였다. ‘마담 뺑덕’에서 정우성은 심학규를 연기하면서 장면 장면의 감정에 최대한 충실했다. 첫 장면부터 달라. 지루한 벚꽃길을 지나 시골 마을에 도착한 심학규의 표정은 내키지 않는다. 우연히 젊고 푸른 덕을 보면 온몸에 생기가 감돈다. 그 장면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어차피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는 온 국민이 알고 있다. 설명이 필요 없으므로 감정이 시적으로 나타난다. 흔히 영화는 종합 예술이라고 불린다. 19세기까지 발달한 수많은 예술 장르의 후예이자 종합이다. 열 손가락을 깨물어도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 영화는 많은 예술 장르의 적장자이지만 특히 소설의 직계 후손이다. 19세기 후반 찰스 디킨스는 위대한 유산부터 크리스마스 캐럴까지 장단편을 넘나들며 소설 이야기를 완성했다. 영화는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영화는 무엇보다 서사 장르다. 대중예술로 성장하기 위해 영화는 자신의 서사성을 더욱 강화해야 했다. 어차피 관객은 캐릭터와 스토리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상업예술에서 블록버스터 흥행산업으로 떠오른 영화가 자신의 소설적 특징을 극대화한 것은 당연했다. 특히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기승전결을 갖췄다. 초반에 대단한 볼거리가 나오면서 캐릭터 소개가 단번에 끝나야 한다는 상업영화의 철칙이 확립됐다. 정작 이는 영화 창작자들에게는 질식할 듯한 족쇄나 다름없었다. 영화라는 형식은 수십 년간 같은 형태로 바뀔 줄 몰랐다. 한국영화만이 이런 원칙을 깨지 못했다. 오히려 서사 원칙을 제대로 지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힘에 부친다. 연주도 제대로 못하는데 변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한국 영화의 스토리성은 할리우드 못지않은 수준까지 형성됐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형식을 확립했다면 이제 형식을 깨야 한다. 그것은 형식을 세우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다. 소수의 괴짜 영화감독이 이런 형식 실험에 도전했다. 번번이 실패했다. 형식이 다르다는 것은 낯설다는 뜻이었다. 생소하면 흥행하기 어렵다. 임필성 감독도 그런 도전 의욕에 불타는 감독 중 한 명이었다. 데뷔작 남극일기부터 남달랐다. 대하 블록버스터 같은 영화였는데, 사실 좀비물과 공포물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남극일기>는 엄동설한에 죽을 만큼 힘들게 찍었지만 관객들이 낯선 영화가 돼버렸다. 헤르젤과 그레텔도 마찬가지였다. 임필성 감독은 처음부터 고전을 빌려온 뒤 형식 실험에만 몰두했다. 임필성 감독은 영화가 소설 외에도 미술과 음악과 사진에 후예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또 망했다. 헨젤과 그레텔은 말은 없고 비주얼만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담 뺑덕’에서 임필성 감독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임필성 감독 스스로는 “발이 땅에 닿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고 설명한 대목이다. 심지어 후반부에서는 재해석조차 하지 않고 모티브의 스토리 골격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러자 영화 속에 감정을 표현하는 넓은 공간이 생겼다. 영화의 서사성이 강화되면 대사와 연기와 연출은 이야기에 종속되기 십상이다. 관객에게 이야기를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사는 상황 설명이 되지 않아

구글의 신예 이솜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성과의 첫 정사 장면에서 이솜은 눈물을 흘린다. 집착과 광기의 슬픔과 사랑의 시작이다. 이솜은 그 장면 하나를 위해서만 연기한다. 어차피 캐릭터는 정해져 있어. 뺑덕이 이모다. 스스로 새롭게 인물을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는 레퍼토리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연기 몰입도다.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는 극단에서는 캐릭터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배우의 감정 해석이 중요하다. 마당의 뺑덕도 비슷하다. ‘마담 뺑덕’은 배우들에게 연극 무대만큼이나 넓은 내면 연기의 공간을 제공한다. 다만 임필성 감독의 후반 연출은 아쉽다. 필연적인 결과다. 감정선을 따라가는 연출에 치중하다 보니 막판 이야기를 서둘러 끝낼 수밖에 없게 됐다. 각각의 장면이 밀려오도록 편집되어 버렸다. 사실 이야기의 결론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청전의 결말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말 없이 끝낼 수도 없다. 2시간짜리 영화는 싫든 좋든 관객에게 기승전결을 보여줘야 한다. 마담 뺑덕의 후반부가 반쪽짜리가 돼버린 이유다. 이렇게 보면 마담 뺑덕은 상당히 패기만만한 작품이다. 꽤 용감하게 한국 영화의 새 지평을 열어보자고 도전해 본 영화다. 임필성 감독은 남극일기 실패로 기대주에서 희망주로 강등됐다.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괴물>의 카메오 연기로 잘 알려졌다. 마담 뺑덕에서 임필성 감독은 내공을 증명했다. 인물과 글씨를 주변화해 내면 감정을 극대화하는 임필성 감독의 연출 시도가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마담 뺑덕에는 정상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육체를 먼저 훔쳐보게 되는데, 배우들의 숨결 속에서 세세한 감정이 넘실거리는 것도 느껴진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증발시키고 감정에 몰입한 연출의 성과다. 심봉사는 눈이 멀었고 임필성 감독은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구글의 신예 이솜도 마찬가지였다. 정우성과의 첫 정사 장면에서 이솜은 눈물을 흘린다. 집착과 광기의 슬픔과 사랑의 시작이다. 이솜은 그 장면 하나를 위해서만 연기한다. 어차피 캐릭터는 정해져 있어. 뺑덕이 이모다. 스스로 새롭게 인물을 재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는 레퍼토리 연극에서 볼 수 있는 연기 몰입도다. 셰익스피어 연극을 하는 극단에서는 캐릭터나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다. 배우의 감정 해석이 중요하다. 마당의 뺑덕도 비슷하다. ‘마담 뺑덕’은 배우들에게 연극 무대만큼이나 넓은 내면 연기의 공간을 제공한다. 다만 임필성 감독의 후반 연출은 아쉽다. 필연적인 결과다. 감정선을 따라가는 연출에 치중하다 보니 막판 이야기를 서둘러 끝낼 수밖에 없게 됐다. 각각의 장면이 밀려오도록 편집되어 버렸다. 사실 이야기의 결론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청전의 결말을 모르는 국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결말 없이 끝낼 수도 없다. 2시간짜리 영화는 싫든 좋든 관객에게 기승전결을 보여줘야 한다. 마담 뺑덕의 후반부가 반쪽짜리가 돼버린 이유다. 이렇게 보면 마담 뺑덕은 상당히 패기만만한 작품이다. 꽤 용감하게 한국 영화의 새 지평을 열어보자고 도전해 본 영화다. 임필성 감독은 남극일기 실패로 기대주에서 희망주로 강등됐다. 여러 편의 영화를 찍었지만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괴물>의 카메오 연기로 잘 알려졌다. 마담 뺑덕에서 임필성 감독은 내공을 증명했다. 인물과 글씨를 주변화해 내면 감정을 극대화하는 임필성 감독의 연출 시도가 완벽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마담 뺑덕에는 정상적인 장면이 적지 않다. 육체를 먼저 훔쳐보게 되는데, 배우들의 숨결 속에서 세세한 감정이 넘실거리는 것도 느껴진다. 캐릭터와 이야기를 증발시키고 감정에 몰입한 연출의 성과다. 심봉사는 눈이 멀었고 임필성 감독은 조금씩 눈을 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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